얼마 전에 대학 선배 한 분이 남편과 친지등 네분이서 플로리다에 놀러 가셨다가 
불의의 사고로 네분 모두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계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만나뵌지는 한참 되었지만, 오래 전 동창모임에 나갔을 때 뵈었던 기억으로는 
개신교회에 나가시던 신앙심 깊은 참 좋으신 분이었다.  
3도 화상으로 얼굴 팔 다리등 피부이식을 받아야 할 정도의 중상을 입으셨다니 
연세도 많으신데 그 고생이 얼마나 크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계속 마음 한구석이 아프다.

하느님을 신실하게 섬기며 (남편분은 장로님이라고 하심) 밝고 착하게 사시던 분이 
차를 타고 플로리다 바닷가로  놀러가시는 소박한 여행길에서 그런 끔찍한 사고를 당하셨다고 하니; 
하느님이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싶기도 하고  평생을 믿어온  하느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들지나 않을까  싶어 걱정스럽다.

성경을 읽다보면 어느 누구보다 하느님을 경외하며 바르게 사는 의인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욥기를 다시 한번 읽어봤다.   
'흠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이' 였던 욥은 아들 일곱과 딸 셋이 모두 죽게되고 
엄청난 재산을 모두 잃는 불행 앞에서도 
"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라고 할 정도의 신심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극심한 가려움을 동반하는 부스럼으로 
또다시 고통을 받게되고, 위로차 찾아온 친구들과 길고 긴 담론이 이어진다.  
자신에게 부당하게 내려진 고통에 대해 하느님께 항변하는 욥의 절규와 
욥에게 닥쳐온 고통의  원인을 나름대로 추정해 보려는 친구들의 긴 대화들이 이어지지만 
성경에서는 왜 욥에게 그런 고통이 찾아왔는지에 대한 속시원한 설명은 나와있지 않다.
다만 욥기의 끝부분에 하느님을 체험한 욥의 고백만이 나올 뿐이다.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당신께서는 "이제 들어라. 내가 밀하겠다.
너에게 물을터이니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의롭게 살던 토빗이 장님이 되어버린 것, 평생 하느님 만을 올곧게 섬기며  백성들로 하여금
메시아 맞을 준비를 시켰던 세례자 요한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 
사도행전에서 접하게 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겪게되는 박해들, 
특히 열정적으로 많은 지역을 돌며 복음을 선포하던 사도 바오로의 수많은 수난과 고통,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착하고 올바르게 살던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보면서,  
"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다고 하지만, 
하느님은 왜 이들에게 이렇게 까지  하셔야만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무엇하나 부족하거나 아쉬울것 없으신 하느님께서 한갓 하찮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외아들 예수를 내어주실 정도의 사랑을 쏟아 부으시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이듯이, 
아무 잘못없는 이들에게 내려진 고통 또한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영역의 신비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갑자기 들이닥친 고통스런 일들로 힘들어 하는 이웃들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스런 시간들이 하느님을 더 가까이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줄여주십사 하고 간구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