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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뜨 레 아 ( Ultreta )
울뜨레아 게시판
울뜨레야(Ultreya)란 주말교육인 꾸르실료 과정을 이수한 사람(꾸르실리스타)들의 정기 모임이다.

꾸 르실료(Cursillo)는 스페인 말로서 작은 과정(Little Course)이라는 뜻이다. 꾸르실료 주말(3박4일)을 체험한 신자를 "꾸르실리스따"라고 부르고 이 과정을 수료한 교우 모임을 울뜨레야(Ultreya) 즉 우정의 모임이라고 한다. 꾸르실료 운동은 교회 내의 평신도 사도직 운동으로서 그리스도 정신에 투철한 꾸르실리스따들을 배출하여 교회의 발전과 복음화에 기여하는 목적이 있다. 꾸르실료 운동이 탄생되었던 1940년대와 그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1930년대의 스페인은 좌우익간의 내전(1936-1939)과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으로 매우 혼란스런 때였다.

내 전은 끝났지만 그 후 몇 년간 스페인 교회는 격동기를 겪고 있었다.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가톨릭 국가이며 모든 시대에 걸쳐 가톨릭 교회에 지대한 기여를 했는데 예수회의 창설자인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를 비롯해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및 성 피터 크레이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들 성인 성녀들은 스페인의 종교 전통이 형성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반 성직자 중심주의는 스페인의 문화역사 안에 깊이 뿌리 박힌 스페인적 현상이다. 이렇게 스페인의 20세기 전반기는 폭력과 불안정으로 특징 지어진다.

공 산주의, 무신론 그리고 반 성직자 중심주의가 많은 스페인인들의 생활에 침투했으며 결국 모로코 주둔 스페인군의 사령관으로 있던 파쇼 장군인 프란치스코 프랑코의 쿠데타로 군사 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는 전쟁에 지친 이 나라에 평화와 질서를 세우려고 노력하였으나 내전에 상처를 입은 나라로서 전쟁으로 받은 빈곤과 혼란, 부정, 부패 및 개인주의, 지역주의 등이 스페인 사회상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꾸르실료 운동이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된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발생되지 않고 스페인에서 그것도 남쪽의 작은 섬 마요르카에서 탄생된 데는 몇 가지 요인을 생각할 수 있다.

첫 째, 스페인의 국민성을 이루고 있는 기질이다. 스페인의 기질은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기질로서 가톨릭 교회 전통에 근거할 뿐 아니라 두 가지 특수한 문화인 유태문화와 무어문화의 영향을 받아, 종교는 국가에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는 신권주의적 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고, 특별히 18세기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수 차례의 내전의 역사에서 스페인적 기질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전의 성격을 보면 모두 종교적 전쟁이었으며 이러한 전쟁은 어떤 측에 속했든 간에 그들을 끈질긴 투지와 전적으로 투신하는 적극적인 근성을 가진 국민으로 만들었다. 둘째, 어떠한 역경에서도 스페인의 가톨릭 교회는 아주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마지막 내전(1936-1939)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으로 인한 무관심과 세속주의의 출현, 특히 공산주의의 위협 등 여러 가지 요인들에 대한 반작용이다. 넷째, 유대교와 이슬람교에 의해 짙게 채색된 스페인의 가톨릭 특성이다.

신 성을 강조하고 교회와 국가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영향이다. 꾸르실료 운동의 탄생 동기를 부여했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있는 성지)는 중세기 이슬람 시대의 성역이었고 이슬람 시대 이후에도 그리스도교의 메카였다. 이곳은 모슬램을 공격하는 목표로서의 상징성을 가진 성전이라는 의미를 가졌으며 그 성전은 순교이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것이 바로 꾸르실료를 탄생시킨 원인이 되었다. 꾸르실료 창시자들은 사도직이란 크리스챤 생활 가운데 덤으로 하는 직분이 아니라 크리스챤 생활 자체의 요구이며 크리스챤 생활이 바로 사도적 생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외형적인 활동기구 만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세상의 누룩이 되고 소금이 되려는 정수 분자로서 그룹을 형성하여 행동적이고 활기 있고, 전투적인 크리스챤 공동체로서 생활하려는 신념이었다. 후안 에르바스(Juan Hervas) 주교와 보닌(Bonin)형제 등 꾸르실료 운동을 시작했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이념적 배경, 곧 마음의 자세를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이념적 배경을 가진 꾸르실료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에 시작되었지만 공의회가 갖는 정신을 이미 적용되고 실천하며 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더 나아가 꾸르실료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일치 사상을 강조하여 교회 공동체 확립에 역점을 두었다. 공의회가 제시한 정신을 공의회에 앞서 반영하고 실천했던 것이다.

꾸 르실료 운동이 우리 나라(한국)에 도입된 과정은 1966년을 전후하여 케빈 오도넬(Kevin O Donnell)이라는 미국인이 주한 평화봉사단 단장으로 서울에 머문다. 그는 이미 여러차례 한국인의 신앙생활을 경험했고 또 한국인의 토속신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무렵 필리핀에서는 꾸르실료 운동이 매우 열성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필리핀의 꾸르실료 운동에 깊이 참여하고 있던 에드몬드 카이모(Edmundo F. Kaimo)씨가 서울에 등장한다. 사업차 서울을 여러 번 방문한 바 있었던 그는 성령의 도움으로 케빈 오도넬 씨를 만나게 된다. "한국교회는 아직 꾸르실료 운동이 일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의 물음에 케빈 오도넬씨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동안 한국에서 꾸르실료 운동에 대해 알고 있는 교우를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이런 대화가 오가면서 두 사람은 한국 교회에 꾸르실료 운동을 전개시켜 보자는 합의를 하였다.

그 후 케빈 오도넬씨는 혜화동 본당 교우였던 한양대학교 이해남 교수와 문창준씨 등 몇 사람과 만나 꾸르실료 운동의 참 뜻을 전하였다. 그리하여 1966년 9월 혜화동 본당 유 수철 주임신부와 청파동 본당 김정수 주임신부의 합의로 시작하여 1967년 5월4일 제1차 꾸르실료를 실시함으로써 21명의 꾸르실리스따가 처음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 이후 꾸준한 노력으로 1971년 8월 전국 14개 교구에 완전히 확산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1970년 10월 24일 전국 울뜨레야를 처음으로 개최하였으며 이 모임을 통하여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크리스챤 활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본당에서는 현재 간사는 이종상 스테파노. 부간사는 남성 이종량 바오로 이며,여성은 최원희 데레사 2분 입니다.

총무 곽성훈 바오로,  재무 전 미련 세라피나 가 봉사를 하고 있으며,본당의꾸르실리스따 형제,자매는 약 100명정도 신앙 생활를 하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약 50여명 정도 꾸르실리스따 형제,자매가 열심히 꾸르실리스따의삶을 살고 있습니다